입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책입니다. 대상관계이론 자체가 어려운 것인지 저자가 책을 어렵게 쓴 것인지 둘 다인지 혹은 제 이해력이 부족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말이죠.
"우리는 잠정적으로 파괴성은 사람이 자신의 바깥에는 존재하는 세상이 없다는 잘못된 시각에서 발생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현상이 우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계획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348쪽)
맥락에서 저 문장만 분리해서 가져 왔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마는 전체 맥락을 놓고 봐도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김창대/김진숙 교수님이 역자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라고 볼 여지는 매우 적습니다. 최소한 '대상관계 이론의 전제'라는 제목을 지닌 10장은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만 잡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열성 성격 특성의 근간을 세운 로널드 페어베언과 해리 건트립에 관해 피상적으로라도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배움이라면 배움입니다. 특히 분열성 상태에 관한 해리 건트립의 말이 기억에 남고 여러분과도 공유하고 싶어서 옮겨 옵니다.
"우리는 분노보다는 결핍감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타자를 파괴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데, 이는 타자를 너무나 열망한 나머지 그들을 진공청소기처럼 삼켜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유사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거식증 환자를 예로 들었다. '저는 사람들에게 적당하게 요구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요구하지 않지요.' 이것은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하는 경험이다."(222쪽)
단순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울이나 분노는 그래도 대상과의 좋은 시절을 최소한이나마 경험한 사람이 가능한 것 아닌가 하고, 분열성 성격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경험이 극도로 드물기 때문에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 그런 대처 양식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혹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된다면 근본 불안을 경험할 것 같고요.
7장은 존 볼비에 할애돼 있습니다. 존 볼비가 대상관계 쪽이 아닌가 생각은 했지만 이 책 읽으면서 그게 맞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관찰을 중심으로 한 볼비의 "실용적인 설명"에 감정적인 요소가 많이 빠져 있기 때문에 건트립을 비롯한 다른 대상관계 치료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음을 알게 됐어요. 저는 다분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전개되다가 소설로 빠질 위험성이 큰 이론보다는 차라리 볼비처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설명이 치료적으로 더 유용하다고 보는 입장이라 볼비 편을 들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애착 3부작 중 2부, 3부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감정이 빠져 있다는 비판은 어떤 맥락인지 더 알고 싶네요.
8장에서 10장은 저자의 경험이 많이 녹아든 챕터인데 사례를 통해 대상관계 이론을 설명하는 8장은 너무 비약이 심하고 차이와 다양성을 다루는 9장은 경계선/정신병, 권력, 사회문화 등의 주제가 따로 노는 느낌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0장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고요. 제 임상 경험이 부족한 탓일 가능성도 높겠지만 과연 이 책이 입문이라는 타이틀을 달 만한가에 대해서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초보 상담자가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네이버 블로그를 좀 검색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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