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도에 대전에서 엑스포가 열렸을 때 사촌과 놀러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초등학생이었고요. 그 때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나라별로 마련된 부스를 한 살 어린 사촌동생과 여기저기 모두 돌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결국 사촌동생은 저를 따라 다니다가 지쳐서 부모님에게로 돌아갔고 저는 홀로 부스들을 돌았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가 아래 대목을 보고 떠오른 기억인데요.
John Maynard Keynes saw the truth at the bottom of all this, which is that our fixation on what he called “purposiveness”—on using time well for future purposes, or on “personal productivity,” he might have said, had he been writing today—is ultimately motivated by the desire not to die. “The ‘purposive’ man,” Keynes wrote, “is always trying to secure a spurious and delusive immortality for his actions by pushing his interests in them forward into time. (중략) For him, jam is not jam unless it is a case of jam tomorrow and never jam today. Thus by pushing his jam always forward into the future, he strives to secure for his act of boiling it an immortality.”- 올리버 버크먼이 쓴 Four Thousand Weeks 중에서 발췌
<파파고 번역>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있는 진실을 보았는데, 그것은 그가 말하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 혹은 그가 오늘날 글을 쓰고 있었다면 "개인 생산성"은 결국 죽지 않으려는 열망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이 남자는 항상 자신의 행동에 대한 관심을 앞으로 밀어냄으로써 거짓되고 거짓된 불멸성을 확보하려고 한다"고 썼다. (중략) 그에게 잼은 내일 잼이 아니면 잼이 아니고 오늘은 절대 잼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잼을 미래로 항상 밀고 나가면서, 그것을 불멸로 끓이는 자신의 행위를 안전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온전히 느끼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처럼 폰을 늘 손에 들고 다니면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을 들여다 보게 되는 그런 세상에서는 더 그렇죠. 마음챙김이다 뭐다 현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어린 제가 "다음 부스"에 정신이 팔린 채 이 부스 저 부스를 도장깨기 하듯 돌아다녔던 것처럼, 현재를 경험하기보다 미래의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서 저 인용구에 등장하는 The ‘purposive’ man처럼 행동하기 더 쉽지 않을까 합니다.
올리버 버크먼은 자신의 한계와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특히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것이 경험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더 많은 것을 생산 및 소유하려 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이유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1] 산업사회 이후의 자본주의 시대정신이 이런 불멸성 추구에 한몫하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엑스포에서 모든 부스를 다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그냥 다 봤다고 SNS에 자랑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카세트 테잎 듣던 아날로그 시대라 자랑도 못 하지만요. 더 많이 경험하려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바라보면서 저런 비극이 한국에서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고, 우리네 일상은 언제나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래 우크라이나의 한 시장님처럼[2], 어제까지만 해도 직장으로 출근하다가 하루 아침에 총기를 들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봅니다. 이런 상상은 언젠가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 인간의 유한함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게 합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 분투하고 있는 것들 중에 정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게 만들고요.
여기서부터가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요. 극단적인 상황의 가정은 삶을 조금 더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지만, 그 순간뿐인 것 같습니다. 다시금 사소한 것들에 일희일비하고, 어린 제가 이 부스 저 부스 돌아다녔듯이 별로 의미 없는 것들에 목숨거는 그런 일상이 다시 펼쳐지겠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제 고작 40대에 들어선 제게는 가능하지 않은 경지 같습니다.
폭넓은 조망에서 본다면 내가 처한 상황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3] 팬데믹의 장기화로 그 사실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요즘이고요. 하지만 한계조차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매일 해도 모자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죽는다는 사실의 부정, 통제 권한이 대부분 내게 있지 않다는 사실의 부정.[4] 저는 이 두 가지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아마 죽기 직전까지 불멸과 확실성을 추구하며 살겠지만, 현존하고자 마음챙김하며 사는 삶과 마찬가지로 그것 또한 나름의 분투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음챙김하는 The ‘purposive’ man이 되고자 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음챙김 명상은 3개월도 못 갔습니다. 저와는 안 맞는 방식이라 느꼈고요. 저는 그냥 The ‘purposive’ man으로 살고자 합니다. 93년에도 그랬고, 2013년의 아래 여행기에서도 그런 소회를 밝히고 있고, 2022년에도 그러고 있으니 아마 이게 제 팔자인가 봅니다.
"생각해 보면 올해 참 많은 것들을 해냈고, 많은 것들을 경험했는데 왜 그렇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을까 싶다.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구멍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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